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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 뉴스] 미·중 무력 충돌로 가나

'눌러 줘야' 했다. 치고 올라오는 중국을 보면서 미국은 불안했다. 우선, 짝퉁을 걸고 넘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대표부(USTR)에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2017년 8월, 그렇게 미중 간의 무역분쟁이 본격화했다. 25% 고율로 보복 관세를 주고받으며 2019년 9월까지 관세 전쟁이 펼쳐졌다. 서로 생채기를 입고 결국엔 그해 12월 무역협상 1단계에 합의했다. 휴전. 그런데 무역분쟁 막바지였던 6월, 미 국방부가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란 걸 발표했다. 좀더 확실히 눌러야겠다는 구상이다. 보고서는 사실상 미래의 선전포고에 가깝다. 중국을 미국의 질서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상정했다. 명분은 인도양에서 태평양까지 걸쳐 있는 지역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역내 항행의 자유 등을 인근 국가들과의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속내는 중국의 일대일로(육상ㆍ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팽창을 틀어쥐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선명했다. 인도태평양전략과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교집합은 '남중국해'다. 두 세력이 맞부딪치는 지역이다. 남중국해는 서남쪽 인도차이나ㆍ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부터 동북쪽 대만에 이르는 바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길목으로 부근에 유망한 해저유전, 천연가스 자원이 넘쳐난다. 중국은 일대일로의 일환으로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하면서 이 지역에 자원ㆍ교통ㆍ군사 요충지를 확보하려고 했다. 반면 미국 입장에서는 대중국 포위망을 강화하기 위해 이 지역이 필요했다. 중국은 영해라고 주장하고, 미국은 공해라고 규정해 자유 항행을 주장했다. 미국은 이지스 구축함을 출동시켜 군사작전을 강행하고, B-1B 랜서 등 전략 폭격기까지 전개했다. 중국도 조기경보기와 대잠초계기 등 첨단 무기를 배치했다. 인근 자국 영토에 인민군과 핵까지 동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복잡하고 살벌한 남중국해 동쪽 끝에 대만이 있다. 최근 집권 2기를 시작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지난 20일 취임 연설을 통해 '일국양제'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하나의 중국' 대원칙을 민족의 자존심으로까지 여기는 중국은 '국가 분열행위'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용납하지 않겠다며 무력 충돌까지 언급했다. 중국과 대만 사이 대만해협을 미국 군함이 통과하고, 중국은 해상 실사격 훈련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다. 만일, 중국이 '앞바다'를 통과하는 미 군함에 흠집이라도 내면 곧바로 미중은 무력 충돌로 맞붙게 될 것이다. 최근에는 또다른 곳 홍콩에서 거칠게 맞서고 있다. 중국이 자치권을 누리는 홍콩에 적용되는 국가보안법을 직접 제정하겠다며 초강수를 두자 미국은 홍콩을 불안정하게 하는 일이라고 반대하며 강경 대응을 경고하고 있다. 중국도 단호히 반격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화웨이 목조르기에 중국 기업의 미국 증시 상장도 차단하고 있다. 막말도 거침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중국의 어떤 또라이(wacko), 얼간이(dope)"이라는 단어까지 내뱉고 있다. 이 정도면 오히려 전쟁이 안 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생존과 생활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i)미국과 중국 두 거인의 아슬아슬한 발걸음에 밟혀 압사당할 것을 걱정해야 하는가 (ii)코로나19에 감염돼 최악의 상황에 놓일 것을 걱정해야 하는가 (iii)경제 침체로 당장 의식주를 걱정해야 하는가. 눈에 보이는 것은 없다. 온통 뿌옇다. 생존의 불확실성 시대다. 김석하 신문제작부장 kim.sukha@koreadaily.com

2020-05-25

[뉴스 속 뉴스] 절망적 빈곤에서의 '뉴노멀'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다시금 심오한 진리다. 올바른 주장의 반대는 잘못된 주장. 정상(normal)의 반대는 비정상(abnormal)이다. 하지만 '치명적 정상'의 반대는 '새로운 정상'이다. 뉴노멀(new normal). 지난 17일 질병통제예방센터(CDC) 톰 프리든 전 국장이 세계는 뉴노멀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상황에서다. 프리든 전 국장은 "지금 상황에서 현명한 조치는 노멀(정상)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뉴노멀로 일어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프면 나다니지 않아야 한다. 정신력으로 눌러 이겨야 한다는 어르신의 말은 이제 비정상이다. 마스크를 써야 한다. 무슨 죽을 병이라고 그러느냐는 동료의 말은 비정상이다. 악수하지 않아야 한다. 조아리지 않고 당당히 손을 내밀어 꽉 쥔 듯 자신감 있어야 한다는 선배의 말도 비정상이다. 미증유 바이러스 자체보다 더 걱정했던 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포에 짓눌려있던 시민들이 생활고에 좌절하면서 거리로 나서고 있다. '못살겠다' '굶어 죽겠다' 사실상 봉쇄, 경제활동 중단으로 제자리에서 맴맴 돌고 있던 분노가 임계점을 향해 치솟는 형국이다. 레바논 한 택시기사는 영업제한 위반으로 단속된 후 분노로 택시에 불을 질렀다. 시리아 난민 가장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한 데 절망해 분신한 채 내달렸다. 튀니지에서도 한 남성이 분신 사망했다. 바그다드에서 운전을 하는 청년은 코로나 통행금지 위반으로 벌금을 물리려는 경찰과 싸움까지 하며 절규했다. "굶어 죽거나 가족이 굶주리는 걸 보느니 차라리 바이러스로 죽는 게 낫다." 세계 각지에서 분신과 시위가 속출, 사회불안과 소요 사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치는 직감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바이러스가 옥죄며 숨막히게 다가오지만, 시민들을 '풀어놔야'겠다. 아시아도 유럽도 이곳 미국도 서서히 통제된 시민과 경제를 풀어놓고 있다. 바그다드 청년이 내뱉은 절규가 동시다발로 분출될까 두려운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한 발짝 물러섰다. 사회적 격리를 조금 완화하겠지만 그도 주지사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입장이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은 "고용 유지와 경제 회생을 위해서 일터 복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황이 악화하면 내가 책임질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은 다르다. 백신과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코로나19 확산 억제를 위해서는 대규모 사회적 격리 외에 대안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회적 격리에 반대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위협이라고 주장한다. 경제는 정치 쪽을 따른다. 하지만 백신을 개발하려면 과학이 뒷받침해야 한다. 또 다른 생각도 있다. '백신을 개발했는데 팬더믹 현상이 끝난다면….' 제약회사로서는 엄청난 연구비와 투자비를 날릴 수 있다. 사스가 그랬고 메르스도 그랬다. 그 바이러스는 현재 백신이 없다. 정치, 과학, 경제 입장이 다 이해된다. 순위 싸움일 뿐이다. 처음엔 '생존'을 위한 과학이, 지금은 '살아가기 위한' 정치에 귀가 쏠린다. 이 와중에도 코로나19는 '한번 해볼래' 계속 위협한다. 정치와 과학이 함께 녹아든 말이 있긴 했다. 갈릴레오의 혼잣말.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일을 중단하는 것은 굶주림이다. 아사로 내몰리는 절망적 빈곤에서 인류 대다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뉴노멀이여, 뉴패러다임을 보여 달라. 김석하 신문제작부장 kim.sukha@koreadaily.com

2020-04-20

[뉴스 속 뉴스] 홀로 남겨두지 않게 해주소서

교황은 밤새 기도했다. "주여! 어찌해야 합니까." 세상은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전날 로마 시내 900여 개 성당이 문을 닫았다. 일부에서 성당 폐쇄는 지나치다는 반대 목소리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격리한 것'이라고까지 비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간절히 애원했다. "주여, 제게 능력을 주소서.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을 도울 최고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을 홀로 남겨두지 않게 해주소서." 다음날 로마 교구 추기경은 성당의 문을 계속 열어놓겠다고 발표했다. 하루 만에 번복한 것이다. 교황은 "과감한 조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LA시가 16일 과감한 조처를 내렸다. 식당에서 식사를 못하게 했다. 웨이트레스 A는 이날 오전 10시 평소대로 출근했다. 휴교령으로 집에 있는 두 아이(9학년, 6학년) 먹을 것을 챙겨주고, 게임만 하지 말고 공부도 좀 하라고 잔소리도 해놨다. 식당에 들어서자 사장이 우두커니 앉아 있다. 영업 준비를 시작하자 "하지마!" 한다. 그러면서 LA시 행정명령을 이야기했다. "뭐라고요! 네?" 일단 이달 말까지란다. 할 말이 없었다. 이러다 해고로 이어지는 건 아닌지. 눈 앞이 캄캄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A는 되뇌였다. '어찌해야 합니까'.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권력'들이 무너지고 있다. 교계는 오랜 기간 열성적으로 확대해온 집회(예배)를 자체적으로 무너뜨리고 있다. 교회의 집단 장소로서의 공공성을 인정하며, 2000년의 권위를 쌍방향 직접관계에서 수동적 온라인 관계로 넘겼다. 학교도 문을 닫았다. 교사의 눈을 보지 못하는 수업만 진행 중이다. 만지지 못하는 돈(숫자)으로 최대 권력을 이어오던 경제의 탑도 흔들거리며 쏟아져 내리고 있다. 짜릿한 재미의 스포츠도 얼어붙었다. 그토록 목매던 정치는 아예 뒷전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멋진 수사를 사용하며 될 수 있는 한 따로따로 지내라고 한다. 벽을 쌓는게 좋을 거 같다며 사람끼리, 인종끼리, 국가끼리 차단의 벽을 올리고 있다. 나만 살자는 생명력은 사방팔방으로 퍼지고 있다. 뜻밖에 물건까지 동나고 있다. 대량생산의 자본주의 한복판에 살지만, 걱정과 불안도 대량생산된다. 바이러스(전염병) 입장에서 보면 처음도 아니다. 몇 번을 다녀갔다.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고, 어떤 집단을 아예 몰살시키기도 했다. 그래도 대부분은 졌다. 교황 기도대로 그들(인류)은 최고의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상상도 못한 일이 처음 벌어지고 있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자신들이 옳다고 내놓은 과감한 조처 안에서 허둥대고 있는 것이다. 온갖 동식물의 강력한 무기는 동료를 홀로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인류는 그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교만 떨고 있지만, 한때 바이러스 같은 존재일 때도 있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페스트를 물리친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생각한다. 페스트 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가구나 속옷들 사이에서 생존한다. 방이나 지하실, 트렁크나 손수건, 휴지 같은 것들 틈에서 살아남는다. 언젠가는 인간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서 또다시 쥐들을 흔들어 깨울 것이다. 행복한 도시로 쥐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올 것이다. 맞다. 계속 올 것이다. 교황의 '홀로 남겨두지 않게 해주소서'란 기도문구에서 A가 떠오른다. 김석하 신문제작국장 kim.sukha@koreadaily.com

2020-03-17

[뉴스 속 뉴스] 재외선거 방식 개선 필요하다

재외선거 유권자 등록이 지난주 15일 끝났다. 10일 기준 LA총영사관에는 재외선거인 562명이 등록했다. 다른 미주공관은 그 이하다. 재외선거인은 영주권자를 말한다. 단기체류자 등 국외부재자 유권자 등록은 재외선거인보다 많다. 공관별로 2000여 명에서 4000여 명까지다. 결국, 두 그룹과 영구명부 등재자까지 다 합해봐야 LA, NY의 유권자 등록 수는 6000명이 채 안 된다. 실제 투표자 수는 반토막난다고 보면 된다. 지난 두 차례 총선에서 투표율은 53%(2012년), 36%(2017년)였다. 4월 15일 선거가 치러지고 투표율이 발표되면 재외선거 무용론이 다시 고개를 들것이다. 사실, 총선(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도 큰 문제다. 우편투표 배제 투표 방식이 큰 문제라는 것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2007년 6월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재외국민은 당연히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도 투표를 할 수 있다. 모든 국민은 ▶정당투표(비례대표) ▶지역구 투표 등 2가지 투표권이 있다. 그러나 2009년 2월 국회가 '살짝 비틀어' 통과시킨 법안은 재외국민에게는 1가지 투표권(비례대표)만 부여했다. 이미 2008년 10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국회에 제출한 개정의견에서 재외선거에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를 포함시켰다. 애초 중앙선관위는 지역 주민이 아닌 재외국민이 지역 대표자를 뽑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위헌의 소지가 다분해 헌재의 결정 원칙을 따랐다. 그런 후 최종 공과는 정치권에 넘긴 것이다. 선관위의 개정의견은 현행 재외선거법이 위헌임을 입증하고 있다. 재외선거에 1가지 투표권만 부여하는 것은 평등선거 원칙을 위반한 중차대한 일이다. 헌법소원을 제기할 여지가 충분하고, 위헌 결정이 날 수밖에 없다. 국회에 아무리 청원하고, 미국을 찾는 의원에게 강하게 윽박질러도 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자기들의 '생명줄'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겠지만, 속내는 '해외 표'로 자신들의 당락이 결정된다는 것이 불안하고 싫다. 헌법소원으로 재외선거에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가 포함된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어디를 지역구로 정할 수 있는가. 재외선거인은 주민등록이 돼있지 않은(또는 말소된) 영주권자다. 우선, 가족관계 등록기준지(구 본적지, 이하 등록기준지로 함)로 하는 경우다.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선거 결과가 왜곡될 수도 있다. 호적제가 바뀌면서 현재 임의대로 등록기준지(호적 개념)를 선택할 수 있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단체가 재외유권자 등록을 한 지역구로 유도해 선거를 왜곡시킬 수 있다. 다음은 해외로 이주하기 전 최종주소지를 지역구로 정하는 경우다. 주민등록이 전산화된 1989년 이전에 출국한 자는 등록기준지를 지역구로 할 수 있다. 다만, 전산화가 안 돼 있어 수작업으로 명부를 작성해야 하는 비효율성의 문제가 있다. 끝으로 재외선거인 등록신청 개시일에 현재의 등록기준지를 관할하는 곳을 지역구로 정하는 방법이다. 어떤 식이든 지역구 국회의원을 뽑을 수 있다면 재외선거 유권자 등록과 투표율은 오를 것이 분명하다. 재외선거는 투표 방법, 투표권 행사 범위 등에서 각종 시비가 나올 수 있다. 12년 6개월 전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을 통해 해답을 미리 내놨다.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국가의 과제다." 손발 묶은 투표 방법, 극히 제한된 투표 범위. 이런 식이라면, 다음부터는 재외선거 거부 움직임이 일지 모를 일이다. 김석하 신문제작부장 kim.sukha@koreadaily.com

2020-02-16

[뉴스 속 뉴스] 재외선거 '접시의 덫'

요즘 기가 막힌 이야기들이 들린다. "선거권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권리행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투표 안 하면 무시당한다." "한인의 목소리를 잘 전달해 한인사회 정치력 높이자." "재외선거에 관심을 갖자." 4월15일 한국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 4월1일부터 6일까지 진행되는 재외선거 참여 촉구의 말들이다. 단체장, 총영사관, 교계 인사들까지 나서고 있다. 그분들께 송구하지만 시니컬하게 대답한다면, "할 수 있게 해줘." 2007년 6월28일 헌법재판소는 재외국민 선거권 제한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듬해 연말까지 법을 정비하라는 사실상 위헌 결정이었다. 헌재의 명령에 정치권 즉 국회는 '마지못해' 재외국민 참정권 법안을 본회의 통과시켰다. '속 모를 해외 표'에 영향받기 싫은 정치권과 '나도 국민의 한 사람' 재외국민의 대결은 일단 재외국민이 이긴 듯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제동을 걸었다. 슬쩍 '접시'를 바꿨다. 이솝우화에서 여우가 두루미를 초대해 놓고는 넓은 접시에 고깃국을 대접한 것 같은 모양새다. 뭔가 좋은 걸 내놓은 것 같은데 실상은 제대로 먹을 수 없게 했다. '접시의 덫'은 이랬다. 투표방법을 공관투표로 국한했다. 선거인등록을 하기 위해 또 투표하기 위해 공관을 방문해야 한다. LA한인타운에 사는 유권자가 LA총영사관을 방문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여긴 땅덩어리 어마어마한 미국이다. LA총영사관 관할 지역만 봐도 중ㆍ남가주를 포함한 캘리포니아 절반과 애리조나, 네바다, 뉴멕시코 등 4개 주다. 이 지역의 총 면적은 110만 ㎢. 대한민국(남한) 전체가 10만 ㎢인 것에 비하면 무려 11배나 크다. 애리조나 피닉스에 사는 유권자가 LA총영사관에 투표하러 비행기 타고 오고 가야 하나. 차를 운전한다면 300마일 X 2. 그것도 2차례나. 적어도 3일 코스다. 항의가 빗발치고, 정치권 저희끼리 생각해도 난센스였다.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 투표소를 공관 외 인근 지역에 한두 개를 추가 설치했다. 또 선거인등록은 인터넷이나 우편으로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면서 마치 획기적으로 재외선거를 바꾼 것처럼 떠벌렸다. 유권자 등록과 투표라는 두 가지 절차를 거쳐야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제도에서, 유권자 등록을 쉽게 했으니 '이제 편하고 쉽게 투표하세요'라며 선심쓰는 모습을 보였다. 재외국민과 해외 한인사회가 요구한 것은 '우편(인터넷) 투표'다. 공관에 가서 투표하기엔 너무 머니 집에서 우편으로, 인터넷으로 투표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핵심(우편투표)은 잘라내고, 변죽(우편등록)만 울린 여우(정치권)는 우편투표가 부정의 우려가 있다며 절대불가를 고수했고, 두루미(재외선거인)는 하다 하다 지쳐서 아니면 뭘 몰라서 이상한 접시의 음식을 먹고 있는 꼴이다. 정치적 선진국인 미국, 영국, 독일 등은 우리와 반대로 공관투표를 배제하고 우편투표만 허용하고 있다. 가뜩이나 외교ㆍ민원 업무로 바쁜 공관에서 투표를 하게 되면 공관과 선거인 양측이 다 피해를 볼 뿐이라는 합리적인 생각이다. 부정투표 운운하며 나라마다 선거제도는 다르다는 정치권에 묻자. "미국, 영국, 독일 국민은 공명정대하고 제나라 국민은 불순하다는 말밖에 더 되느냐?" 이미 오래전 선거 주무부서인 중앙선관위에서도 우편투표 도입을 국회에 개정의견으로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이조차 무시한 정치권은 투표율 저조를 내세우며 재외선거 무용론까지 펼치고 있다. 해외 한인사회가 재외선거 참여 촉구를 외치고 있지만, 문제는 정치권이 짜놓은 '접시의 덫'이다. 그 접시를 깨는 쪽에 한마음으로 나서야 한다. 여우는 결코 두루미를 위해 호리병을 만들지 않는다. 김석하 신문제작부장 kim.sukha@koreadaily.com

2020-01-14

[뉴스 속 뉴스] 계단의 정신

# 나이 드신 분이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 두 발의 동작은 젊은 날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한 발을 내딛고 그 다음 다른 한 발을, 앞선 발 옆에 놓는 식이다. 계단 한 칸 움직일 때 두 번의 발걸음. 노인이 아니면 10계단은 오른발, 왼발 10번의 발동작으로 끝난다. 하지만 노년에는 최소 20번이 필요하다. "많이 힘드세요?" "다리 힘도 없고 평형감각도 없어진 것 같아 그래." 서너 계단을 내려오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슬쩍 혼잣말하신다. "이러면서 삶의 여러 가지 후회도 하는 거지…." 삶의 끝자락은 후회다. 매년 오는 연말도 예외는 아니다. #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일상에서 가장 갈등을 겪는 순간이다. 요즘처럼 쌀쌀할 때는 얼큰한 국물의 짬뽕이 생각나지만 막상 서너 젓가락 먹다 보면 옆 자리의 달콤한 짜장면이 아쉽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아쉬움을 채우고자 메뉴를 뒤바꿔도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짬짜면'이 나왔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불과 몇 년 만에 그 메뉴의 파워는 종적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유는 후회가 안 남기 때문이다. 짜장면(짬뽕)을 시키면 '짬뽕(짜장면)을 시킬 걸' 하는 후회가 있어야 다시 중국집을 찾게 되는데 두 개를 동시에 다 먹게 되다 보니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결국 중국집을 찾는 빈도가 적어진다. 양손에 떡을 쥐면 '앉아있게' 마련이다. 후회는 선택의 상황에서 발생한다. 선택할 것이 많은 사람은 이래도 저래도 후회다. # 프랑스어에는 'L'esprit de l'escalier(레스프리 드 레스깔리에)'라는 말이 있다. 마음, 정신을 뜻하는 에스프리와 계단을 뜻하는 에스깔리에의 합성 관용구다. 직역하면 '계단의 정신'.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아 먹고 마시고 한참을 떠들고 난 후,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아, 그때 그런 농담을 했으면 기가 막혔을 텐데'하고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농담이나 기지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말을 내뱉고 나서 또는 일을 저지르고 나서 드는 후회를 뜻한다. 이탈리아 속담에는 '배가 가라앉은 다음에야 배를 구할 방법을 알게 된다', 우리 속담에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국에는 좀 살벌한 속담이 있다. '죽은 자식 눈 열어보기'. 후회는 세상 어느 지역에나 다 있는 감정이다. 사람이라는 생물은 대부분 올바르지 못한 판단을 하고 나서 후회를 하지만 고쳐지기는 힘든 존재라는 걸 옛날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다. 전부 '하지 말자'는 경고성 이야기다. # 이맘때면 행복 조바심에 빠진다. '~해야 하는데'. 이 말은 곧 '~했어야 했는데'로 바뀐다. 다시 말해 행복 조바심은 후회를 낳는다. 행복이라는 것이 가물에 콩 나듯 생기는 거라서 사실 우리네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라는 통속적인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교과서류의 수많은 말이 나온다. '후회에 휩쓸리지 말고, 그것을 교훈 삼아 다음에는 그런 일이 없게끔 반성하고 다짐해라' '인제 와서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후회해야 한다. 후회가 많다는 것은 제대로 살았다는 거다. 후회가 있어야 삶의 모든 행위에 의미가 있다. 후회는 뒷걸음이 아닌 변화의 서막이다. 후회는 선택, 목표, 도전의 같은 말이다. 새해 첫날이 다가온다. '세우고 무너지고'를 무수히 반복하면서 결국엔 '대충 그냥 그렇게'로 이어지지만 저마다 결심을 세우는 시기다. 새해에는 후회를 쏟아내자. '작심삼일'을 삼일 꼴로 작행(作行)하자. 계단에 서서 떠오르는 후회는 소중한 영양분이다. 김석하 사회부 선임기자 kim.sukha@koreadaily.com

2019-12-25

[뉴스 속 뉴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종(鐘)소리는 연말연시에 울려 퍼진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제야의 종소리는 은은하게 들려온다. 어둠을 걷어내는 것, 즉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에서는 은은하고 장중하게 들리지만 서양의 종소리는 명료·경쾌하고 어찌 보면 날카롭기까지 하다. 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퍼지는 울림이 달라서 일 것이다. 동양의 종이 주로 바깥쪽에서 커다란 나무 기둥을 부딪쳐서 울리는 방식이라면 서양의 종은 대체로 종 안쪽에 방울이 달려있고 밑에서 줄을 잡아당겨 방울이 왔다 갔다 하면서 치는 방식이다. 12월의 종소리는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다. 그런데 그 종소리가 듣기 싫어서 자선냄비 설치를 꺼리는 비즈니스 업주들이 많다고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 그 종소리가 짜증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구세군에 따르면 30~40년 전만 해도 두부 장수의 종만 한 것을 들고 있었는데 지금은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정도의 작은 것으로 대체했다. 종의 역할은 여러 가지다. 시간을 알려주거나 신호를 보낸다. 그중에서도 ‘끝’을 알리는 내용이 주된 역할이다. 시쳇말로 '종 쳤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예전에 종은 주로 조종(弔鐘: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뜻으로 치는 종)의 의미가 훨씬 강했다. 17세기 영국 풍습에는 마을에 사람이 한 명 죽으면 교회 종탑에 종을 쳐서 사람이 죽은 사실을 알렸다. 귀족들은 하인을 시켜 누가 죽었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당시 영국 시인 존 던은 기도문을 썼다. ‘세상 누구도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이다/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진다/ 모래 벌이 씻겨나가도 마찬가지다/ 그대와 그대 친구들의 땅이 쓸려 내려가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서 울린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의 제목을 짓고, 글에서도 나오는 이 기도문에서 그 누구는 바로 당신이었다. 모든 인간의 삶은 하나로 묶여 있다. 개인은 섬처럼 육지에서 홀로 떨어져 독립된 채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자선(慈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전에는 ‘남을 불쌍히 여겨 도와줌’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존 던의 기도문처럼 남은 타인이 아니다.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남을 가를 구분은 사실상 없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고 시인은 갈파했다. 종소리가 어디서, 누구에게서 나오는 소리냐고 묻지 말아야 한다. 그 종소리는 당신을 위한 것이다. 그것을 알리는 종소리를 시끄럽다고, 짜증난다고 타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종소리를 내주는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는 살아있는 나의 장례식에 가장 먼저 온 조객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사례하는 것이 자선이다. 누구를 위하여 자선했느냐고 묻거든, 나 자신을 위해서라고 답하는 게 맞다. 종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작아도 울림은 크다. 김석하 사회부 선임기자 kim.sukha@koreadaily.com

2019-12-03

[뉴스 속 뉴스] 명품과 자존심, 자존감의 함수

# 명품 매장에 가면 '하얀 손장갑'과 '불친절'에 압도당한다. 가격표의 숫자는 나중이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직원들은 하얀 손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명품을 다룬다. 고객이 쉽게 만져볼 수도, 마음대로 꺼내볼 수도 없다. 게다가 고객이 와도 본체만체. 무언의 냉랭한 불친절은 자존심을 긁는다. 하얀 손수건과 불친절은 고객에게 대놓고 말한다. "꺼내주고 보여주면, 살 수 있는 능력은 돼?" # 자존감과 자존심은 모두 자신을 좋게 평가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자존심은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얻는 긍정이며, 자존감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긍정이다. 이에 따라 자존심은 끝없이 타인과 경쟁해야 존재할 수 있으며, 꺾이면 무한정 곤두박질친다. 반면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믿음, 긍지다. 상황에 따라 급격히 변하지 않는다. # '명품(名品)'.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내에서는 안 쓰던 단어였다. 1995년 루이뷔통 홍보 담당자는 고민했다. '럭셔리(luxury)'를 한국말로 어떻게 번역하는 게 좋을까'. 사전대로 옮기자면 사치품쯤 되는데, 어감이 부정적이다. 그대로 쓰자니 낯설었다. 선택된 단어는 명품. 매력적이고 함축적인 느낌의 이 단어는 한국 내에서 해외 유명 패션 브랜드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명품이라는 단어의 확장성이 얼마나 빠른지 패션에서 화장품, 자동차, 전자 기기, 음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며 급속도로 퍼져갔다. # 몇 년 전 한 대학 연구팀이 이색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직원이 불친절할수록 소비자의 구매율이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한 고급 백화점을 예로 들었다. 쇼핑객이 화장품을 구입하러 백화점을 찾았는데 직원이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계속하자, 쇼핑객은 고가의 화장품을 구입했다. 상당수 쇼핑객이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보고서는 직원의 행동과 소비자 입장을 비교 분석한 결과,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구매 심리를 자극한 것으로 밝혀졌다. # 사회관계측정(sociometer)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자존감이 개인이 지각한 자신의 사회관계를 반영하는 척도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누군가가 원만한 사회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는 자존감이 높을 것이고, 반대로 사회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경우, 자존감이 낮을 것이라는 게 이 이론의 핵심이다. # 연말이 다가온다. 사람들이 모이는 이런저런 자리가 많다. 콧대를 세우고 싶은 계절. 이맘때부터 명품 드러내기에 목숨 바치는 사람 여럿 본다. 다음달 카드 명세서를 보면 자존심의 대가를 실감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명품은 일반인에게 '매우 비싼 것'이다. 명품을 사는 사람은 일반인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기 때문에 구매한다. 정작 상류층은 일반인의 명품을 '고작 그거?'하는 데도 말이다. # 자신감은 도전하고 싸울 수 있게 하는 '창'의 감정이다.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방패'의 감정. 자존감은 창과 방패의 부딪침, 즉 모순(矛盾)을 슬기롭게 통제하는 통 넓고 깊은 마음이다. 자존심은 그때 그때 변하는 방어적 기제이지만, 자존감은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 명품 에르메스의 브랜드 철학은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다. 당신의 명품은 무엇인가. 김석하 사회부 선임기자 kim.sukha@koreadaily.com

2019-11-12

[뉴스 속 뉴스] 어떻게 카메라 바깥으로 나가느냐

스마트폰은 이제 끝났다. 폰이라는 기능으로 볼 때 이미 진화는 멈췄다. 스마트를 상징하는 검색·안내 기능도 마찬가지다. 다 거기서 거기다. 이젠 부록 싸움이다. 최근 애플사가 아이폰 11을 내놨다. 카메라 렌즈가 3개나 달려 있다. 광각, 초광각, 망원 렌즈. 스마트카메라 시대를 예고하는 것인가. 스마트폰 출시 이래 신기했던 것은 두 가지다. 분명 전화기인데 말은 줄고 손가락으로 자판을 눌러댄다. 또, 마구 찍어댄다. 한 장면이 수십 장이다. 하지만 파일로 저장·보관만 한다. 이른바 포토 키핑족. 액자에 끼워진, 앨범에 정리된 진짜 사진을 본 지 오래다. 또, 자신의 모습이 찍히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던 옛 감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셀피(selfie) 천국. 기억하시는가, '트루먼 쇼'. 20년 전 영화다. 당시 최고 배우였던 짐 캐리가 보험사 직원 트루먼으로 나온다. 그는 평범한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감으로 산다. 하지만 그는 5000대가 넘는 카메라를 통해 하루 24시간이 낱낱이 드러나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다. 그만 이 사실을 모른다. 전 세계 17억 명의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탄생부터 30년 인생을 TV를 통해 지켜본다. 살고 있는 도시는 거대한 세트장. 트루먼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배우다. 20년 지기 친구도, 사랑하는 아내도, 동네 한 사람 한 사람 모조리. 지금 우리는 자진해서 트루먼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렌즈를 통해 나를 트루먼화한다. 여기저기 나타난 내 모습을 보며 확장의 자유를 느끼는 듯하다. 유튜브로 동영상을 올려 내 삶을 쇼로 만들고, 전 세계 사람들의 시선에 이 쇼를 던진다. 카메라에 붙잡힌 '100만 구독의 클릭'으로 부를 쌓는 삶을 바란다. 트루먼은 실존의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모험심이 있었다. 트루먼 쇼의 제작자 입장에서 이것은 불온한 열정이다. 자칫 방치했다가는 엄청난 돈을 들여 세운 세트와 수많은 엑스트라 배우의 인건비가 무용지물로 전락할 수 있다. 막아야 한다. 트루먼의 모험의지를 꺾어야만 한다. 어떻게든 세트 안 세계에 눌러 앉혀야 한다. 제작자는 바다 너머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트루먼에게 특단의 방법을 계획한다. 아버지를 졸라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게 한다. 때마침 거센 비바람을 일으켜 아버지를 물에 빠져 죽게 한다. 아버지 사고사에 대한 죄책감, 물에 대한 공포. 이 일을 겪고 난 트루먼은 주저앉는다. 주변 배우들도 별의별 방법으로 트럼프의 탈출을 막는다. 그러나 결국 진짜 세상을 감지한 트루먼에게 제작자는 마지막으로 회유한다. "네가 나가려는 진짜 세상은 진실이 없는 거짓뿐인 위험한 곳이다. 내가 창조한 세상(세트장)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몸과 욕망의 탈주선을 안정된 형식과 규범, 원칙들에 맞춰 적당히 통제하며 살아온 우리. 그 세상에서 뛰쳐나감은 바보짓인가. 트루먼은 세트장을 빠져나가면서 인사한다. 환하게 웃으며, "나중에 못 볼지도 모르니 미리 말해 두죠. 좋은 오후, 좋은 저녁, 좋은 밤 보내세요." 스마트카메라 거미줄 사이에 우리 모두는 트루먼이 될 것이다. 누가 나를 지켜보겠는가? 난 평범하다고? 하지만, 시청자들이 트루먼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것은 그가 지극히 평범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스마트폰만 뒤져봐도, 유튜브 시청 목록만 봐도 인간 복제의 절반 이상은 완성할 수 있는 세상. 앞으로는 어떻게 카메라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떳떳해지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카메라 바깥으로 나서느냐다. 김석하 사회부 선임기자 kim.sukha@koreadaily.com

2019-10-01

[뉴스 속 뉴스] 동맹 방위 분담 '기대'에서 '압박'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이 지난달 28일 취임 첫 기자회견에서 "인도·태평양 역내에서 동맹과의 긴밀한 공조를 통한 안보 활동을 확장하는 동시에 '공정한 방위 분담'을 압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6월 인도·태평양 전략 발표 보고서에서는 동맹들의 공정한 부담을 '기대'한다고 했는데, 불과 두 달 만에 '압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수위를 높인 것이다. 지난 칼럼(8월 7일자: 인도-태평양 전략 아래 한국과 일본)에서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 대폭 수정된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는데,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중국의 패권 추구를 막기 위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인도·호주·일본 등 '맹주국'을 둠으로써 미국 혼자 맡기에는 너무 넓고 복잡하고 부담스러운 이 지역을 관리하겠다는 전략에는 당연히 엄청난 방위비가 들 수밖에 없다. 특히 남중국해와 관련 역내 동맹의 해군력 동원 요구가 높아질 것으로 보이는데 해군력 현대화는 비싼 비용이 동반되는 만큼, 기대보다는 압박 노선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빈센트 브룩스 전 한미연합사령관은 2일 '미국의 소리(VOA)'와 인터뷰에서 "전통적으로 한반도 내 대북 억지력에 초점을 맞췄던 한미동맹 전략의 전환이 요구되는 사안"이라며, "북한의 위협과 중국 문제를 분리할 수 있는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예단하기 어렵지만, 결국 한국 정부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방위비 분담금과 관련, 지난 3월 한미 당국이 방위비 분담금 협정 유효기간을 3~5년 단위에서 1년 단위로 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견지하는 정책 즉, 안보를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다루는 접근방식은 한국의 현 정권으로서는 '죽을 맛'이다. 국민 대다수는 안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반대 정파는 안보가 무너지고 있다며 미국의 손을 꼭 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는 중 북한은 미사일을 계속 쏘아 댄다. '압박'은 손을 벌리는 일만이 아니다. 분위기로 누르는 것도 있다. 최근 지소미아(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결정에 미국 고위 인사들은 한미동맹까지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지난달 프랑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일본 아베 총리는 트럼프를 구워 삶았을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겠다"며 압박성 발언을 했다. 마치 한국전쟁을 유발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과 비슷한 '트럼프 라인' 설정의 위협처럼 들리기도 한다. 랜드연구소 브루스 베넷 선임연구원은 미국이 부채를 동맹에 대한 분담금 인상으로 만회하려는 이 같은 전략은 자칫 향후 동맹의 역내 방위력 약화로 연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불신으로 인해 미국산 첨단무기에 대한 예산 삭감과 구매력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북한을 등에 이고 있는 한국은 예외'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3일 회고록 '콜 사인 혼돈(Call Sign Chaos)'을 출간한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 장관은 "역사를 통틀어 동맹이 있는 나라는 번영하고, 동맹이 없는 나라는 쇠퇴"한다며 전통적 우방과의 동맹을 최우선시했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를 저울질하던 트럼프 대통령을 막은 것도 매티스다. 이제 그는 옆에 없다. 어쩌겠는가. 꼼짝없이 방위비 분담금을 미국이 원하는 대로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가. 답답하다.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9-03

[뉴스 속 뉴스] 노년의 비극은 '격리'

# 70대 노부부가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부부는 머리 등에 각각 1~3발의 총상을 입고 숨져 있었다. 남편이 남긴 쪽지에는 아내의 심각한 건강 문제를 언급하면서 "의료비를 내기에 충분한 돈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남편(77)은 아내(76)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80대 노부부.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수술 후 오른쪽 반에 장애가 생겼다. 남편은 아내의 손과 발이 돼야 했다. 아내는 점점 기억과 의식을 잃어가며 치매 증상을 보였다. 남편이 물을 먹이며 "안 마시면 죽어" 했지만, 아내는 마시는 척하다가 다 뱉어냈다. 화가 난 남편이 따귀를 때리고는 곧 미안하다고 했다. 남편은 누워있는 아내의 얼굴 위로 베개를 들어올린다. # 남편(78)이 아내(74)에게 "여보, 같이 가자. 사랑하니까 그러는 거야"라고 했다. 남편은 전날도 저녁상을 챙기고 아내가 음식 먹는 것을 도왔다. 음식물을 흘리면 다시 입에 넣어주었다. 50년을 같이 산 아내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의 초점을 잃었다. 주위에 잡히는 것을 마구 던졌다. 치매에 걸린 후 2년 가까이 있어왔던 일이라 그러려니 참았다. 어느 날 아내는 "바람피운 거 다 알고 있다. 넌 부모 없이 막 자란 놈"이라며 막말을 해댔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들에게 전화했다. "내가 네 어미를 죽였다." # 먹을 것이 부족한 일본의 두메산골. 오래 살면 죄인인 곳이다. 이 동네 법은 70세가 되면 산으로 가서 죽어야 한다. 69세 어머니는 너무나 건강한 자신의 몸이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이(이빨)가 너무 튼튼했다. 남몰래 부싯돌로 이를 치곤 했지만 머리만 울릴 뿐이다. 사별한 큰아들이 재혼하는 날, 기쁨에 돌절구 모서리에 냅다 이를 부딪쳐 앞니를 부러뜨렸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아들은 어머니를 지게에 짊어졌다. 어머니는 산 정상 유골이 가득한 곳 빈틈에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정했다. 뒤돌아보는 아들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노년의 마지막은 죽음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살아있을 때 '죽음'은 없다. 죽음이란 우리가 사는 동안 어떠한 관계도 가질 수 없는 절대적 종말, 결국 타인들에 의해서만 확인될 뿐이다. 비극은 경계가 모호하다. 위에서 4가지 노년의 삶을 들었다. 영화 같기도 하고, 실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첫 번째는 지난 7일 워싱턴주에서 발생한 브라이언 존스(77)와 패트리샤 존스(76) 부부의 실제 죽음이다. 두 번째는 201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프랑스 영화 '아무르(Amour)'. 세 번째는 2012년 한국에서 일어난 실제 상황이고, 네 번째는 1983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일본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삶이 아무리 발전하고 편리해져도 결국 대다수는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이 빠져나간 솜뭉치 같은 뇌로 어떤 이상하고 창피한 짓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억누른다. 복지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노년의 삶은 격리된다. 누군가의 경제활동에 걸림돌이 되면 가차없이 병원·양로시설 등에 격리될 뿐이다. 거기서 생물학적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살인-자살만이 이 시대의 마지막 선택지란 말인가. 인간은 이 마지막 무렵을 '관계 속에서' 받아들이고 싶다. 노년의 비극은 '격리'속에서 싹튼다.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8-20

[뉴스 속 뉴스] 인도-태평양 전략 아래 한국과 일본

한일 경제갈등이 '총성 없는 전쟁' 상태에 돌입했지만, 의외로 미국은 조용하다. 말 많은 트럼프 대통령까지도 입을 닫고 있다.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나 조정을 바라고 있는 한국정부로서는 당혹스럽다. 보통의 '미국답지' 않기 때문이다. 왜일까. 지금의 한일 경제전쟁을 한꺼풀 벗겨보면, '인도-태평양 전략'이라는 거대한 개념이 도사리고 있다. 이 전략의 기본 구조는 아베 일본 총리가 제안한 내용이고, 미국은 태평양사령부의 명칭을 인도·태평양사령부로 변경하는 등 인도·태평양전략 구체화와 제도화에 착수했다. 그리고 지난 6월 1일 인도-태평양전략보고서(IPSR)를 발표했다. 이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 대폭 바뀐 것을 선언한 것이다. 핵심은 중국을 견제하고 굴기를 틀어막자는 내용이다. 인도-태평양 지역은 세계 인구 50% 이상이 거주하면서 세계 GDP의 60%를 생산하고, 세계에서 물동량이 가장 많은 10개 항구 중 9개가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 국가들과 미국의 교역액은 2.3조 달러에 달하고, 이들에 대한 미국의 직접투자액도 1.3조 달러에 이른다. 군사적으로 세계 군사강국 10개 국 중 7개 국가가 위치해 있고, 이중 6개 국가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군사력 현대화, 약탈적 경제 정책 등을 통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지역을 미국 혼자 맡기에는 너무 넓고 복잡하고 부담스럽다. 지역별로 '맹주국'을 하나씩 두는 게 유리하다. 미국은 인도와 호주가 동남아시아를, 동북아시아는 일본이 그 역할을 맡게끔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간단히 말해, 새로운 아시아판을 미국 아래, 지역 맹주국, 동맹국, 파트너국 모양의 피라미드 체계로 구성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인도·태평양전략보고서는 일본을 '현대화되는 동맹'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른 동맹국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사실상 맹주국을 수사적으로 다르게 표현한 것이리라. 보고서는 또 미일동맹은 평화와 번영을 위한 주춧돌(corner stone)이라고 그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러면서 인도·태평양 지역을 유지하는 데 미일상호방위조약과 주일미군은 필수적 요소임을 확인하면서 전략적 동맹을 강화해 나갈 것을 천명했다. 구체적으로 5만4000여 명의 병력, 로널드 레이건 항모와 7함대, 미 해병 3해병원정여단, 이지스함과 F35 스텔스 전투기 배치 등 주일미군의 규모와 장비까지 열거하고 있다. 과거, 주일미군이 주한미군을 서포트하는 요소 정도에서 핵심요소가 부상한 것이다. 이는 일본(특히 우익)이 원하는 바다. 일본은 이제 군사대국화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자 한국에서는 일본산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정부는 대응 카드로 한일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별로 갖고 있는 것도 없고 민감한 군사정보는 사실 미국이 쥐고 있어 그들이 '(일본에) 줘라'하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 문재인 대통령은 "이 기회에 북한과 협력해(평화경제), 이 위기를 단숨에 극복하겠다"고 했다. 일본으로서는 불량국가 북한과 협력한다는 말을 듣고 "거봐,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거 잘한 일이지"라며 미국의 칭찬을 기대할지 모른다. 인도·태평양전략은 아베 총리의 구상이고, 트럼프 정부는 이를 그대로 미국의 대 아시아정책으로 확정했다. 일본은 인도-태평양전략 아래 동북아시아 맹주국으로 올라서고, 지금의 한일 경제갈등은 향후 불거질 일에 비하면 새발에 피일지 모른다.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8-06

[뉴스 속 뉴스] 트럼프의 '너희 나라' 개념

4명의 여성에게 쏘아붙였다. 라틴계, 팔레스타인 난민, 소말리아 난민, 흑인 등 유색인종 여성 의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들 민주당 초선 의원들을 향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너희 나라'의 개념도 확실히 했다. 부패하고, 범죄가 들끓고, 무능한 재앙적 국가. 트럼프는 "너희가 미국을 나쁘게 얘기하는데, 그러면 너희 나라부터 먼저 뜯어고치고 돌아오라"고 했다. 사실상 조롱이다. 동네 애들이나 하는 짓거리를 미국 대통령이 했다. '동네 애들 짓거리'는 각 단어의 유치한 뉘앙스에 비해 의외로 논리가 분명하고 명료하다. 그러니 그쪽 편 애들은 환호한다. 그래서 말을 먼저 내뱉는 측이 일단 승리하게 돼 있다. 후 공격인 상대편은 흥분해 억지를 쓰는 것처럼 비친다. 결국 내 편에겐 기쁨과 웃음, 상대편에게는 모욕과 수치를 안기는 것으로 끝난다. 이 짓거리가 말로 끝나면 다행이다. 말싸움 공방이 이어지다 보면 협박조의 말투가 등장한다. 이 정도 되면 동네 애들은 극단적으로 갈린다. 이때부터 짓거리는 사건이 된다. 한 편의 리더는 패거리의 수장으로 우뚝 올라서는 기회다. '준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조롱당한 4인방 가운데 한 명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뉴욕) 의원에게 '총알 한 방'을 먹여야 한다고 협박성 글을 올렸다. 이 경관은 '코르테즈의 예산 발언: 우리는 군인들에게 너무 많은 급여를 주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뉴스를 보고 격분, 페이스북에 코르테즈 의원을 '비열한 멍청이'라고 비난하고 그녀에게 "한 방이 필요하다"라고 글을 올린 것이다. 그는 해고됐다. 또, 그 포스트에 '좋아요'를 붙이며 동조한 동료 경관도 해고됐다. 동네 애들 짓거리에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한 방이 현실화하거나 해당 경찰의 해고에 반대하는 패거리의 응원이 여기저기서 생겨나면 '진짜 사건'이 된다. 트럼프의 조국(할아버지가 독일 출신으로 1880년대에 미국 이민)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제일 먼저 트럼프를 비난했다. 유대인, 집시 등을 싹쓸이 인종 청소한 선조의 잘못된 역사를 알아서인지 그는 "(트럼프의 발언에) 단호히 거리를 두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여성의원 4명에 대해 "연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실 아무리 돌아가라고 윽박질러도, 4인방 여성의원 중 3명은 갈 곳이 없다. '너희 나라'가 없다. 코르테즈 의원은 뉴욕 브롱스 출신이다. 라시다 틀레입 의원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출신. 아야나 프레슬리 의원은 신시내티 출신으로, 시카고에서 자랐다. 딱 한 명, 일한 오마르 의원만 '너희 나라' 소말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인물이다. 그러고 보니 트럼프의 '너희 나라' 개념에서 부패하고, 범죄가 들끓고, 무능한 국가는 각기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를 지칭한 것인가. 하긴 그 3개 도시가 그쪽 면에서는 거의 세계 정상급이긴 하다. 한일 무역전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출신 이민자 가정이 이곳 LA에 많다. 은근히 미국의 중재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데, 칼자루를 쥐고 있는 트럼프가 '너희 나라' 개념을 들이댈까봐 두렵다. 부패·범죄·무능 면에서 우리가 낫나? 일본이 낫나? 트럼프는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동네 애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재선 길에 승기를 잡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다른 민족 사람들이, 미국을 위대하게 하도록 기여하는' 미국 정신은 무너지고 있다.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7-23

[뉴스 속 뉴스] 이희호 여사의 동행

"빈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인생이 그러한데, 그래서 동행이 필요하다. 외로워서인가, 누군가를 만나면 그가 같이 갈 동지이거니 바란다. 그러나 책에서, TV에서 등장하는 위인이나 유명인은 '원거리·정면'에 고정돼 있다. 그 물리적 위치와 거리는 그들을 더 능력있고, 멋있고, 신비롭게 한다. 동행이 와닿지 않는다. 배우자는 그런 면에서 동행인, 동지가 되기 힘들다. 매일 가까이서 보기 때문이다. 물리적 거리를 확보할 수 없어 온갖 추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 외면만이 아니다. 위선, 유치함, 간교함, 때론 사악함까지 드러날 수 있다. 가까우면 사랑할 수 있지만 존경하기 힘든 이유다. 이희호 여사가 남편 DJ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달랐다.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남편을 떠나 보내고 그해(2009년) 말 출간한 자서전 '동행'에서다. 책에는 김 전 대통령의 '짧은 거리·뒷면'이 담겨있다. "남편은 군것질을 좋아한다. 인절미를 비롯한 떡과 사탕 종류를 즐겨 먹는다. 여름에는 딱딱한 아이스바를 자주 먹는다. 특히 붕어빵을 아주 좋아했다." 수퍼 엘리트 여성운동가인 이희호는 3차례의 낙선으로 빈털터리에 애까지 둘 딸린 김대중과 결혼한 이유를 짧게 이야기했다. "잘 생겼잖아요." 왜 결혼했느냐는 질문에는 이런저런 소리 늘어놓는 법이 아니다. "예쁘잖아요" 못지 않게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마디였고 배려였다. 1962년 결혼 직후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대선 후보로 나선 남편 찬조연설에서 "만약 대통령이 돼 독재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라고 외쳤다. 1972년 미국에서 한국의 독재 상황을 알리던 남편에게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고 편지를 썼다. 옥중의 남편에겐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라고 했다. 추위를 잘 타는 남편이 불을 때지 않는 교도소에 있는데, 자신만 따뜻하게 지낼 수 없다며 냉방에 꿇어 엎드려 기도를 하다 정신을 잃기도 했다. 2년 6개월간 수감 중인 남편에게 보낸 책만 600권에 달했다. 책을 미리 구해 읽고 중요한 대목에 마크를 했다. 면회 가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 내 남편 살려주세요'가 아니고 '하나님 뜻대로 하십시오'였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보낸 편지에는 "당신의 생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욱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라며 "당신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바르게 살기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그래서 받은 것이 고난의 상입니다"라고 썼다.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랐던 이 여사는 대한민국이 실제적 민주화로 첫 발을 내디딘 6·10 민주항쟁의 날 영면했다. 14일 이 여사는 평생 동지이자 동행인 DJ 곁으로 떠난다. 동행이라는 마차의 두 바퀴는 사랑과 존경이다. 사랑은 따라가는 것이고 존경은 이끌어주는 것이다. 사랑은 이끌어주는 것이고 존경은 따라가는 것이다.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동행의 바탕은 기쁨도 영광도 아니다. '함께 울어줄 사람', 고난이다. 김 전 대통령은 세상을 뜨던 그해 2월 7일 일기에 글을 남겼다.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6-12

[뉴스 속 뉴스] 왜 오르려고 하는가

개인적으로 등산에 흥미가 없다. 그래서인지 '밑에서 올려다보는 산이 아름답다'고 줄곧 생각해 왔다. 왜, 기를 쓰고 올라가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한 번? 유혹의 말은 2명의 입에서 나왔다. 우선 산악인 조지 맬러리. 에베레스트 등정을 두 번이나 실패(21년, 22년)한 뒤, 1923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짧은 말을 남겼다. "Because it's there." '(산이) 거기 있기에'로 회자되는 그 유명한 말이다. 세 단어로 압축한 간결함 속에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울린다. 또 한 명은 프랑스의 지성, 장 폴 사르트르다. 산악 등반과는 전혀 관계없는 실존주의 대가. 단편소설 '에로스트라트'에서 인간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를 들이댔다. "인간을 관찰할 때엔 높은 데서 내려다보아야 한다. 인간은 누가 자기의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의 앞뒤에만 신경을 쓴다. 누가 7층 위에서 내려다본 중절모자의 꼴에 대하여 상상이나 할 것인가.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고 웃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자랑하는 직립자세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은 납작하게 기다시피하는 긴 다리가 어깨 위로 뻗어나오고 있지 않은가. 7층의 발코니- 나는 여기서 일생을 보내야 마땅했을 것이다." 조지 맬러리는 1924년 3차 등정에 나선 후 실종됐다. 75년 뒤인 1999년, 8520m 지점에서 엎드린 채 미라 형태의 시신으로 발견됐다. 해진 옷감 안쪽에 G. Mallory가 새겨져 있었다. 1865년 영국 측량국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8848m)을 발견했고, 산 이름을 몰라 측량국 초대국장인 조지 에버리스트의 이름을 따와 에베레스트로 명명했다. 원래 이름은 초모룽마(티베트어로 세상의 어머니). 66년 전 오늘(1953년 5월29일) 신만이 허락된 탁구대 2개 너비의 땅이 인간에게 자리를 내줬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둘 중에서 누가 먼저 올랐느냐는 수많은 질문에 힐러리와 텐징은 "한 팀으로 동시에 정상에 도착했다"고 말해왔다. 그러다 텐징 사후, 힐러리는 "그가 언제나 앞서 갔다"는 말을 남겼다. 신만의 영역 에베레스트에서 최근 일주일 새 1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작년 전체 사망자(7명)보다 많다. 이유가 뜻밖이다. 눈사태나 눈보라, 강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등반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다. 산 정상을 앞두고 병목현상이 생기면서 많게는 800명 가까운 등반 인파가 300m 넘게 이어진다. 보잉 747 순항고도에 해당하는 높이인 8800m 고지에서 한두 시간을 기다리며 혹한과 고산병, 탈진으로 숨지는 일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뒷배경은 상업 등반이다. 산악전문 여행사들이 두당 6만 달러에서 8만 달러를 받고, 아마추어 산악인들을 하루에 수십 명씩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운반해' 준다. (사진) 영하 40도에서 걸음당 6번 이상의 호흡이 필요한 에베레스트 정상. 셀피를 찍으며 폼 잡고 싶은 아마추어 산악인의 난장판으로 인해 에베레스트의 숭고함은 옛일이 돼가는 듯하다. 정상을 300여 미터 앞두고 미라가 된 맬러리, 먼저 정상 코앞에 올라왔지만 힐러리를 위해 바로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텐징.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돈으로 처발라 폼 재려다 사람에 치여 숨진 것은, 사르트르가 의미했던 '위치 에너지'면에서 7층과 길바닥 차이다.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5-28

[뉴스 속 뉴스] 하얀 원피스의 적

"정치라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다시금 절감하고 있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털어놨다. 2일 사회원로 초청 자리에서다. 최근 한국 국회는 선거제·개혁법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둘러싸고 난장판을 벌였다. 그 꼴을 보고 당을 즉각 해산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 건수가 20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서로에게 '죽일 놈'이자, 가까이하기엔 너무 부끄러운 당신이다. 풍성한 햇살, 따뜻한 반짝임. 결혼식 하면 5월이 최고다. 한국에서 한 결혼정보회사가 결혼식 참석 예절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밝혔다. 환영받지 못하는 '민폐 하객'은? 신랑·신부 험담하는 사람, 축의금 적게 내는 사람, 참석도 안 하고 바로 밥 먹으러 가는 사람 등이 올랐다. 가장 싫다고 답한 하객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온 여성이었다. 여성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2%가 싫어했다. 돋보이고 홀로 주목받아야 하는 신부 입장에서 하얀 원피스의 여성 하객은 밉상이다. 가수 이광조 노랫말마따나 "아! 당신은, 당신은 누구시길래~ 잊으려하면 할수록 '열받음'이~" 더욱 더한 것이다. 이른바 '가까이하기엔 너무 ( ) 당신' 현상이다. 당장 주위를 둘러봐라. 괄호 안 들어갈 형용사들이 주르륵 보인다. 얄미운, 부끄러운, 아니꼬운, 피곤한, 무식한, 천박한, 치사한 등등 다양하다. 여기에 사회적 동물의 생태적 비애가 있다. '당신'은 나와 한 공간에서 한 솥 밥을 먹고 지내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점이다. '하얀 원피스' 족속은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우선, 끊임없이 본인을 입증하려 든다. 표면상 보기 좋은 결과에 집착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가장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삶을 보는 시각이 좁아질 뿐이다. '지금 당장'의 문제만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잃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둘째, 모든 일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상대방이 가볍게 던진 말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상대는 조언·권유의 수준에서 말을 했는데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항상 자신이 옳다고 자기도취에 빠져있어 상대의 말을 지나치게 의식, 상처받고 실망한다. 셋째,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항상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만 쏟아낸다. 듣는 사람도 처음엔 동조하다가 지친다. 괜히 피곤해 진다. 넷째, 자신을 항상 피해자, 희생자의 입장에 둔다. 잘못은 다른 사람이 저지르고 나만 피해 본다고 외친다. 과거의 안 좋은 경험을 통해 상처가 생긴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지휘하지 못한다. 누구나 이들 '가까이하기엔 너무' 부류와 연결 줄을 동강동강 다 끊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관계란 양쪽이 줄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인간 관계 호불호의 모든 사태는 '상황'에서 벌어진다. 하얀 원피스의 하객은 내심 친구의 좋은 날에 정성스럽게 차림을 갖추고 참석했을 뿐일 수도 있다. 문제는 1인칭 단일 시선만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상황이란 기본적으로 위, 아래, 앞, 뒤 4군데 꼭짓점을 찍어봐야 입체적으로 튀어나온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엇갈리는 시선의 교집합 속에 '관계의 현명함'이 들어있다. "하얀 원피스한테 빨간 페인트 확 뿌려!" 하고 싶지만, 뿌리는 순간 나의 흰색 드레스도 핏물 튀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하기엔 너무한 '당신'은 언제든 '내'가 될 수 있다.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5-02

[뉴스 속 뉴스] 노트르담

화재가 발생한 노트르담 대성당의 원래 이름은 Cathedrale Notre-Dame de Paris. 줄여서 노트르담(Notre-Dame)으로 지칭된다. 프랑스어 노트르(Notre)는 '우리의', 영어로 말하면 Our이다. Dame은 '부인·마님'의 마담(madame)에서 소유형용사 ma(나의)를 빼고, d를 대문자를 써서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따라서 노트르담은 '우리의 성모 마리아'이다. 이 성당은 이름처럼 성모 마리아를 주보성인(수호성인)으로 봉헌되었다. '유럽 관광지의 태반은 성당'이라는 말처럼 유럽에는 많은 성당이 있는데, 상당수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돼 노트르담이란 명칭은 여기 저기에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노트르담은 파리에 위치한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칭한다. 노트르담 성당은 116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초석을 놓으면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돼 지금의 큰 골격은 1250년에 마무리되었다. 나머지 부분 공사는 약 1세기 동안 진행되어 1345년에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시기를 세계사에 견주어 보면 1206년 몽골의 테무진이 칭기즈칸이 돼 1271년 원나라가 세워졌다. 1299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건국됐고,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했다. 1347년 유럽에 흑사병이 대유행했으며, 1368년에는 중국의 명나라가 건국됐다. 한국사로 보면 고려 18대 의종~29대 충목왕 시대였다. 1335년 태어난 이성계가 10살 때 노트르담은 완공됐고, 이후 47년 후 조선이 개국했다. 사실상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세계사의 마디마디는 '노트르담 이후'의 역사인 셈이다. 1456년 이곳에서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열려 이미 종교재판으로 화형(1431년) 당한 잔 다르크의 이단 판결과 마녀 혐의가 취소되었다. 프랑스 대혁명(1789년~1794년) 당시 귀족문화, 종교문화를 증오하는 시민들에게 첨탑 등이 훼손되고 성당 내부가 외양간으로 쓰이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흔히 '노트르담의 꼽추'로 알려진)이 인기를 끌면서 평가도 좋아져 간신히 재건된다.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이 장면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엄청나게 큰 그림(610×931㎝·1807년 작)으로 묘사했다. 무엇보다 이 걸작은 세계 1차 대전과 참혹했던 2차 대전의 포화에도 굳건히 버텨왔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초기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고딕 양식은 이탈리아가 아닌 그 북쪽에 위치한 프랑크 왕국 계열의 건축양식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이탈리아인들은 '야만적인(고트족)'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던 '고딕'을 갖다 붙였다. 찌를듯한 높이의 첨탑과 외부로 튀어나온 많은 기둥들, '빛'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 넓은 면적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특징이다. LA시간 15일 아침 비보를 접하고 96미터 높이의 첨탑과 1300그루의 참나무로 이뤄진 지붕이 붕괴하는 것을 보면서 이튿날이면 참혹한 검은 숯 더미를 예상했지만, 성당의 기본 골조와 상징과 같은 전면 탑 두 개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 '장미 창'은 온전한 편이라고 한다. 보도에 의하면 500여 명의 소방대원이 진화작업에 나설 때, 성당 내 역사적 유물의 재질과 위치를 잘 알고 있는 문화관리자 100여 명이 함께 참여했다고 한다. 복원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비록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5년 이내(2024년 파리 올림픽) 재건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들에게는 정치에 앞서 예술에 대한 사랑이 먼저다.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4-16

[뉴스 속 뉴스] 신념과 신념 고착은 다르다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은 체육시간이면 국민체조를 솔선수범했다. "하나 둘 셋 넷" 찰진 구령소리가 귓가에 여전히 남아있다. 배경 음악과 몇몇 동작은 지금도 기억난다.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마구 뛰놀고 싶은데, 별 이상한 걸 다한다고 여겼다. 그 나이 그 유연성에는 당연했으리라. 그러나 선생님은 열심이셨다. '뭘 저렇게 하나'할 정도로. 당시 선생님 나이가 되다 보니 아이들을 가르친다기보다는, 자신의 몸을 생각해서 열심히 하셨던 것 같다. 스트레칭. 노화의 첫 특징은 뼈가 굳어 가는 것이다. 예전엔 양말 신는 것도 한발로 서서 다른 발에 척척 신었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 줍는 것도 허리 한번 구부리면 끝이었다. 지금은 힘들다. 국민체조 열심히 해놓을 걸. 그랬다면 어깨도 편하고. 허리도 가뿐하고, 목도 잘 돌아갔을 텐데. 이제와 스트레칭을 하려고 하니, 큰 일이 돼버렸다. 요즘 LA다저스의 류현진이 잘 던지면서 야구 보는 맛이 즐겁다. 게다가 유튜브 덕분에 메이저리그 각 구단의 게임 하이라이트를 보는 게 낙이다. 9회 동안 참 별의별 일이 생겨난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흐름이 있다. 잘 될 때는 몸이 쭉쭉 펴지는 것과 같이 좋은 흐름을 탄다. 안 될 때는 움츠러드는 모습이다. 그 한 뼘의 차이가 승패를 가르는 것을 보면, 분명 경기 전체에도 '게임 스트레칭'이 작용한다. 나이 들면 신념으로 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경험과 소신에서 오는 굳게 믿는 마음이다. 문제는 신념에 스트레칭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이다. 점점더 굳어질 뿐이다. 정치면에서, 종교면에서, 가족면에서, 인간관계에서 확고한 신념은, 되레 말썽을 야기할 때가 많다. 맞부딪치는 것이다. 물론 신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삶에서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단, 자신의 신념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신념도 중요히 생각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신념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줄 아는 자세도 필요하다. 바로 정신적 스트레칭이다. '신념을 가진 사람이 가장 무섭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진실을 알 생각이 없다'.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신념은 우리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단어다. 하지만, 이면에는 폭력이 존재한다. 흔히 '신념 고착'이라고 한다. 신념 고착은 자신이 지닌 신념에 집착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신념 고착은 모든 인간이 가진 자기보호 본능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새로 유입된 정보가 자신이 현재 지닌 신념을 뒤흔들 만한 영향을 지녔다고 판단될 경우, 기존의 신념을 보호하기 위해 신규 정보를 거부하고 기존의 신념을 다시 한번 고착화시킨다. 새 정보가 아무리 맞다 해도 결코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꼴통' '꼰대'가 잉태되는 순간이다. 요즘엔 유튜브가 신념 고착에 일조하기도 한다. 자신의 신념 고착을 위해 도움될 정보는 잊지 않고, 반드시 필요한 정보는 내다버리는 행위가 일상화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논리적인 생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신념 고착의 유지를 위해 자기합리화, 이중잣대, 확증편향, 자기본위적 편향을 지닌 사람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신념은 나침반의 바늘과 같아야 한다. 바늘은 반드시 남북을 가리키지만, 항상 바르르 떨린다. 신념은 어느 정도 여유 공간이 있다. 하지만 신념 고착은 흔들리지 않는다. 정신적 스트레칭을 위해 "국민체조 시작!"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4-04

[뉴스 속 뉴스] 재외국민은 패싱하자는 겁니까?

한국 국회가 선거법 개정안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야 3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은 '50%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크게 반발하며, 차라리 '비례대표제'를 폐지하자고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해외 한인사회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일이 아니다. 핵심이 '비례대표제'이기 때문이다. 재외국민은 대한민국 선거에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자유한국당 당론처럼 비례대표제가 폐지되면 300만 재외국민의 참정권이 대폭(절반) 축소되는 것이다. 일단 한국 국회의 정쟁을 들여다 보자. 자유한국당을 뺀 여야 4당 합의안의 핵심은 의원정수는 300석을 유지하되, 지역구 대 비례대표 비율을 3대1로 하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역구 대 비례대표 의원 수는 225 대 75가 된다. 현재는 253대 47석. 비례대표 의원 수가 28석 늘어나는 것이다.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2개 당으로 나눠진 작금의 정치권에, 전 국민의 민심을 골고루 반영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하지만, 비례대표를 배분하는 방법이 복잡해 '난수표' 같은 계산법이라는 비난도 나온다. 자유한국당이 결사 반대하는 핵심은 이렇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가면, '붉은 색' 기운의 정의당이 교섭단체로 올라서 민주당과 함께 국회의 2/3를 차지, 대한민국이 좌경화될 소지가 다분하다고 우려한다. 특히 정의당은 지역구 선거에서는 미미하지만, 정당 지지율이 높아 비례대표 의원을 많이 배출할 개연성이 높다. 그건 못 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의원정수도 270석으로 축소하자고 맞불을 놓고 있다. 그런데 국회 의원 수를 줄이자는 데는 대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고 있다. 한 발 떨어져 보면, 양측의 전략이 재미있다. 어떤 대의명분을 짜고, 어떤 층의 호응을 얻을지를 철저히 계산한 '속살'이 보인다. 그러나 한 발 가까이 들어가, 재외국민 유권자 입장에서 들여다 보면 허탈하다. 아니 '왕따' 당하는 기분이다. 그런데. 어째 미주 한인사회가 조용하다. 현재도 반쪽짜리인, 그나마 참정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각계각층 많은 한인 인사, 각 지역 한인회, 참정권 회복 단체들이 전부 말이 없다. 해외 한인사회 특히 미주 지역에서 불꽃같이 일어났던 참정권 회복 운동으로 12년 전인 2007년 6월 28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국내 주소지가 없는 재외국민의 선거권을 제한하는 법률 조항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상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러면서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투표) 행사를 납세와 병역 의무 이행에 대한 반대급부로 예정하고 있지 않다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재외국민은 2012년 19대 국회의원 총선 때부터 참정권을 행사했다. 당시 재외국민 유권자들은 선거인 등록을 하고, 투표하러 오는 등 2번의 번거로운 절차를 위해 수백 마일이 걸리는 선거장소(총영사관)까지 두 차례 왕복을 하는 열정을 보였다. '정치적 미아'에서 '진정한 국민'이 됐다는 기쁨이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해외 한인사회는 자유한국당 당론대로라면 또다시 정치적 미아 신세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각자의 정치적 성향을 떠나, 투표 자체를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에게 묻고 싶다. "재외국민은 패싱하자는 겁니까?" 나 대표는 지난 19일 4당이 추진 중인 선거법 개정안에 대해 "국민이 알 필요도 없고, 국민이 뽑을 필요도 없다는 국민 패싱 선거법으로서 이제는 국민까지 패싱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너지는 헌법 가치 국민과 함께 지켜나가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2007년 헌법재판소의 재외국민 참정권 회복 결정은 헌법 가치를 대변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국민과 함께라고 했는데 재외국민은 국민 아닙니까?" 묻고 싶다. 하나 더. 판사였던 나 대표에게 "헌법재판소가 '재외국민도 지역구 선거에도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국민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1인 2표를 갖고 있다'고 한 내용을 아느냐?" 그렇다면 "자유한국당은 지역구 의원 270명만 뽑자고 했는데, 그 안에는 재외국민 국회의원도 포함되는 겁니까? 해외 한인사회에도 지역구를 허용하는 겁니까?" 묻고 싶다. 미주 각 지역 한인회장에게도 묻고 싶다. "다들 재외국민 참정권 회복에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왜 말(반론)이 없으십니까?" "재외국민 투표권 두 개(대선, 국회의원 비례대표) 중 하나를 박탈하려고 하는 자유한국당이 옳습니까?" "해외 한인사회는 호구입니까?" 말이 없는 자는 패싱된다.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3-19

[뉴스 속 뉴스] 인생은 재미·의미 '맛'이다

퀴즈. 척추동물 중 가장 뛰어난 미각을 지닌 것은? OO. 가장 냄새를 잘 맡는 것은? OOO. 음식은 철학 교과서다. 어떻게 살면 '재미있는, 의미있는' 삶인지 가르쳐준다. 음식과 인간의 일차적 관계는 미각(맛)을 통해서다. 혀에 있는 무수한 돌기(미뢰)로 맛을 느낀다. 정확히는 음식물의 성분이 물, 혹은 침에 녹아 미뢰의 수용체에 닿을 때 인지하는 감각이다. 그렇다고 맛이 전적으로 미각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후각과 촉각, 통각 등이 합쳐져 결정한다. 특히 후각(냄새)이 결정적이다. 코감기에 걸렸을 때, 음식을 질겅질겅 씹으며 문득 의문이 들곤 한다. '음식 맛은 코로 느끼는 것이었나?'. 맞다. 맛의 80% 가량은 후각이 담당한다. 실험을 했다. 피실험자가 냄새를 맡지 못하는 상태에서 눈을 가리고, 양파와 사과를 먹는다. 맛을 구분할 수 있을까. 대부분 못 했다. 주스로 갈거나 물에 담가 양파의 매운 향이나 맛을 줄이면 더더욱 구분하지 못한다. '정재인율'이라는 것이 있다. 시간이 흘러도 정확하게 감각을 재인식하는 비율이다. 냄새의 정재인율은 70% 이상으로 다른 감각보다 높다. 후각세포가 코 깊숙이 뇌하고 아주 가까운 곳에 밀집해서다. 냄새는 감정과 직결돼 있다. 따라서 냄새를 맡은 당시 상황을 그대로 기억(재인식)하는 일이 높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갈망하는 '어머니 손맛' '할머니 손맛'은 사실상 못 찾는다. 그 추억의 맛은 수십 년 전 음식 재료 자체의 냄새에다가 그 당시 집 안의 냄새, 그 지역의 산천초목 냄새, 비·아지랑이·바람 등 계절의 냄새가 뒤섞여 있다. 세월이 흘러도 그 냄새(맛)의 기억은 매우 또렷하다. 허름한 내부에 낡은 테이블과 그릇 등이 올려진 식당이나 주점에 가면, 각종 음식이 맛있게 느껴지곤 한다. 시각의 정재인율을 높인 착각이다. 복잡미묘한 '우주적 냄새'를 재현할 수 없지 않은가. 최근엔 미각의 착각을 통해 지구 환경과 개인 건강을 살리자는 시도가 본격화되고 있다. 미국에 이어 한국서는 고기가 1g도 들어가지 않은 100% 채식 햄버거가 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패티는 식물성 고기 생산업체가 생산한 것이다. 시식자(채식주의자)들이 "고기와 너무 비슷해 불편하다'고 불평할 정도란다. 익히면 붉은 육즙이 흘러나온다. 패티에 있는 '헴(heme)'이라는 물질이 헤모글로빈에 들어있는 붉은 색소 분자로 돼 있기 때문이다. 식물성 고기는 기존 육류와 비교해 토양 사용량을 95%, 온실가스 배출량을 87% 감소시킬 수 있다. 인생 선배들은 두 부류다. 한쪽은 "재미있게 살게, 그게 행복이야" 한다. 다른 쪽은 "의미있게 살게, 그게 참 인생이야" 한다. 둘 다 삶의 지향점으로 충분하다. 다만, '재미'와 '의미'라는 두 단어가 이정표를 가르는 셈이다. 재미는 순우리말이지만, 어원은 자미(滋味)다. 뜻은 자양분이 많고 맛도 좋음. 또는 그런 음식. 의미(意味)는 행위나 현상이 지닌 뜻, 사물이나 현상의 가치라는 뜻이다. 보이는가? 두 단어에 공통으로 '맛 미(味)'자가 들어있다. 음식은 요리의 다른 말이자 결과물이다. 요리는 두 가지 이상의 재료와 양념(소스)이 아우러져 맛을 내는 작업이다. 맛은 재료들을 '잘 섞는 게' 핵심이다. 우리는 오감으로 세상과 교류한다. 매일 시각과 청각을 통해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외부의 수많은 재료를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무성한 재료를 절묘하게 섞는 게 미각이고 후각이다. 다른 감각에 비해 평가절하된 두 감각이 의외로 인생을 조화롭고 건강하게 한다. 매일 하루 서너 차례, 습관적으로 음식을 대할 때 못 느꼈던 재료의 섞임을 음미할 때 인생은 재미있고, 의미있다. 첫 문장 퀴즈의 답은 1.메기 2.코끼리. 김석하 논설위원 kim.sukha@koreadaily.com

2019-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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